거지 패의 두목에게 속아 네르타 왕국으로 팔려 간 이프네는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성녀가 되면서 이전보다 더 처참한 삶을 살아가지만, 언젠가 데인을 만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릴 적 거지 패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두목에게 매일 얻어맞을 때마다 데인만은 그녀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챙겨 주며 의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신에게 제물로서 바쳐지기 직전, 황제의 전리품이 되어 제국으로 돌아왔다. *** “네르타에선 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모르겠으나, 내겐 그저 개미보다 못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황제인 내게 기쁨을 줘야, 개미보다 못한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 않겠어?” 강압적인 말투와 행동, 그 안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다정함. 먼 네르타에까지 소문이 전해질 정도로 유명한 폭군인 그의 살벌하기 그지없는 금안에서 문뜩문뜩 데인의 까만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황제 테타르 아크슈비츠에게 그녀는 전쟁에서 이긴 왕국에서 주워 온 전리품이자 죽일 듯 구석으로 몰아넣고 모른 척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주면서 가지고 노는, 한낱 물건보다 못한 존재였다. 제국의 군대가 들이쳤을 때 네르타 따위는 버리고 도망쳤어야 했다. 멍청하게도, 미련한 기대를 품지 말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어.” 그녀의 귓가에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테타르의 목소리가 이프네의 피를 차갑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