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어린 봄, 초여름의 장마, 가을의 변덕, 시린 겨울을 보내기까지. 홍범과 교인은 약 2년간을 함께해 온 연인이다. 하지만, 둘은 저들의 확신할 수 없는 미래와 속죄를 둘러싼 문제로 갈등을 겪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은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믿었고, 홍범도 그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노력해 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회의감은 점점 깊어지는데……. 두 번째 겨울이 시작될 즈음. 홍범은 소리 소문 없이 교인의 곁을 떠난다. 그렇게 둘의 사랑에는 종말이 찾아왔다. 1년 후, 여름. 서울을 떠난 교인은 여수의 한 섬마을에서 공보의 생활을 하던 중에 뜻밖의 인연을 만난다. “그렇게 싫었습니까. 제가 했던 말이.” 마른 볼가를 오가던 교인이 손가락이 천천히 멈췄다.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감은 눈으로도 저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쯤은. ‘섬에서는 그 머리가 유행인가 봅니다.’ 며칠 전, 검은색으로 염색을 한 제 머리였다. 동네 마트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약으로 아주 짙고, 검게 물을 들인. “예뻤는데.” “…….” 그 네 음절에 무수히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저 감은 눈 너머로도 보이지 않는 마음이 느껴지듯. 당신은 그토록 말이 없는 편인데도. 그 만남이 구원일지, 사랑일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신하지 못했다. 계절이 바뀐 섬마을에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날아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