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에 발발한 왜란이 끝나 혼란이 가득한 때, 나는 이판에게 납치되어 역성혁명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부모님을 죽인 왕을 증오했고 납치한 나를 제 여식으로 만들어 부원군의 자리를 탐하는 이판 또한 증오했다. 그렇게 숯을 삼키는 나날들을 견뎌내고, 드디어 혼례식 날이 왔다. 하여 내 부모를 죽인, 내가 가장 증오하던 왕이 내 목숨을 구해준 어린 시절의 정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차마 죽이지 못했다. 부모의 원수에게 연정을 품었다. 애정마저 죄가 되는 삶을 살았다. 목적지를 잃은 복수라는 글자가 비수가 되어 나에게 날아왔다. 차마 너를 죽이지 못한 나는 나의 죽음으로 너를 벌하고자 한다. 아파라,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라. 내가 견뎠던 고통만큼, 내가 견디었던 연정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