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 탈루와 공작 살해죄로 멸문당한 에르넬 자작가의 차남 루시안. 홀로 살아남은 루시안은 노예로 팔려 가던 중 살해된 공작의 아들, 카이든 베젤티크에게 붙잡힌다. “살려… 살려 주세요. 뭐든 다 하겠습니다.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그래…. 네가 할 만한 일이 있긴 하지.” “그게, 무, 무슨….” “어차피 늙은 변태한테 팔려 바쳐질 몸뚱이였잖아. 대상만 바뀌게 된 것뿐이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닐 텐데.” 노골적인 말을 내뱉은 사람이라기엔 한없이 무감한 태도였다. 느릿하게 훑어보는 시선에서도 욕망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제안이 무엇이든 루시안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 “아, 아아…….” 털썩. 눈꺼풀이 깊은 밤 장막처럼 내려앉자 이윽고 세상은 완전히 암전되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무언가가 비쳤다. 그게 이 방에 내려앉은 어둠인지,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동자인지 루시안은 알 수 없었다. “…….” 카이든의 시선이 잠든 루시안의 얼굴 위에서 멈췄다. 루시안 에르넬을 데려온 이유는 그뿐이었다. 단순한 호기심. 그 호기심이 풀릴 때까지, 혹은 더는 궁금해지지 않을 때까지. 마음껏 울리고, 짓이기고, 품에 안다가, 그러다 질리면 버리면 그뿐인 일이었다. 그런데 왜…. 잔잔한 호수에 옅은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