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했다. 사랑하는 여동생의 왕세녀 즉위식 날, 믿었던 노예의 손에 의해서. 노예는 사실 왕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온 제국의 대공이었고, 오직 나만이 그의 칼 아래 살아남아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는 남편과 강제로 혼인식을 올렸다. [도망가게 해줄까?] 어릴 때부터 내 주위를 맴돌던 악마가 유혹하듯 속삭였다. 나는 무시했다. 내가 도망간다면, 한때 왕국의 백성들이었던 망국의 유민들을 제국이 가만 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자 악마는 이번엔 다른 것을 속삭였다. [네 남편이라는 자, 얼굴이 궁금하지 않아?] [대체 어떤 자이길래 얼굴을 안 보여 줄까?] [괴물처럼 못생겨서? 아니면 너무 늙어서?] [그도 아니라면…… 네가 알면 안 되는 자라서?] 무시하려 했지만,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백성들의 안위가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단 한 남자…… 내 가족을 죽인 그자만은 절대로 내 남편이어서는 안 됐다. 그날 밤, 나는 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남편의 아래에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침대 밑에 단도와 등불을 숨겨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