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고려 말. 홍건적에 목숨을 잃은 어머니와 딸을 두고 벼슬하러 간 아버지. 그를 대신해 함경에서 홀로 가문을 이끈 이청하. 오랜만에 딸을 찾는 아버지에 개경으로 향하지만, 반기는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 청하에게는 외로움에 젖은 나들이가 전부였던 날. 운명처럼 나타난 그 사람, 최서우. “아, 제가 이름도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최서우라고 합니다.” 청하의 앞으로 허여멀끔한 손 하나가 나타났다. 굳은살이 박여 있는 손 마디 끝에서, 진한 묵향이 풍겼다. 희한하게도 청하가 좋아하는 도화꽃의 잔잔한 내음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복숭아처럼 달큰한 향이 훅 끼치자 청하의 볼이 잘 익은 과실 마냥 달아올랐다. 서우에게 어릴 적 스쳤던 청하와의 짧은 인연은 하나뿐인 벗이 싫증을 낼 정도로 반복했던 날의 기억이었다. 기적 같은 재회에 성공했지만,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될 가문의 사람이라니. “참으로 어여쁩니다.” 그러니 연모한다는 말도 말아야 할 텐데. 자연스레 나간 진심에 심장은 박동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서우는 청하를 놓을 자신이 없었다.